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영화 (문단 편집) == 1953-1991 == 스탈린 사망 후,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등장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해빙기가 도래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비에트 영화계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어 소련 영화인들은 보다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 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영화인들의 유입으로 소련 영화계에는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1957년에 개봉한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 이 영화에서 '''한국인에게 [[모래시계]] 삽입곡으로 잘 알려진 [[백학|백학(Журавли)]]이 삽입되었다.''']는 그 점에서 흐루쇼프 체제의 해빙을 알리며 소련 영화의 국제적 성공을 시작하는 영화로 꼽힌다. 1962년 제작된 SF 컬트 영화 《앰피비언 맨》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제작되던 역사, 문학 관련 작품들 역시 성행하였는데, 주요 소재는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다. 40년대와는 다르게, 이 당시 전쟁을 묘사한 작품들은 국민 선동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에서 탈피해 보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1959년 작 [[병사의 시|'병사에 대한 발라드']]로, 전쟁 중 포상으로 휴가를 받게 되자 고향으로 잠깐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자 하는 병사의 이야기이다. 예술 영화의 거장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이반의 어린 시절]]》로 데뷔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브레주네프]]가 집권한 이후로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처럼 가혹한 탄압을 받은 사례도 있다. 여하튼 이때 소련 영화는 비교적 값싼 영화관람료로 시간을 때우기 족하다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높은 관객수를 기록했는데 TV보급 등의 이유로 영화관객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에도 '''관객수 1500만명 이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흥행실패작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1인당 연간 영화 관람횟수는 20회 정도로 세계 수위권을 다투웠으며 그 영향으로 영화관객수가 세계 1위(연간 관객수가 40억명 가량 기록했다.) 전 세계 영화관의 절반 이상이 소련에 있었을 정도였다. 1970년대애서부터 1980년대까지 소련전역의 영화관수는 약 15만개였다. 당시 소련의 경쟁국이었던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인도보다도 영화관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그 만큼 당시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함하는것이 당대 소련인들 사이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얘기인것이다. 물론 1980년대 이후로 관객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들었기는 했지만 소련붕괴 이전까지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거대한 영화시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에서 소련이 영화시장을 개방한다면 수익을 거하게 얻을수있을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활약한 여배우로 [[아나스타샤 베르틴스카야]]가 있다. "소련의 [[비비안 리]]" 라고 일컫어질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그녀는 1961년 '진홍색 돛' 으로 데뷔해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이후 '앰피비언 맨', '전쟁과 평화'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 러시아 영화계 굴지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더불어 이 시절, 비록 사상적인 한계가 있다고 해도, 여러 모로 꽤 볼만한 영화가 많았다. [[전쟁과 평화]]처럼 무려 75만명을 동원하여 [[기네스북]]에 사람을 가장 많이 동원한 영화로 올라가서 아직까지, 아니 미래에도 깨어지지 않을 기록도 이 시절 소련 영화였다. 이런 거 말고도, 거대한 드래곤을 잡는 러시아 전설에 대한 영화로도 10만명이 넘는 엑스트라를 동원하거나, 2차대전 쿠르스크 전투를 그린 영화를 만들며 30만에 이르는 엑스트라 및 실제 전차 수백여대를 쓰며 독일 및 다른 나라 배우까지 캐스팅시켜 독일군과 영국군으로 나오게 하던 것도 이 시절 나왔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로 영화를 찍은 것이다. 소비에트 정권 말기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점차 보장되자, 국가가 독점적으로 제작하던 영화시장에도 실험적인 독립영화가 진출할수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이전까지 개봉되기 힘들었던 소련 사회의 어두운면을 다룬 사회비판적인 영화들이나 이전의 검열로 인해 창고에서 잠들었던 영화들이 속속 개봉되었으며 개중에 <53년의 차가운 여름>, <어린 베라> 등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다수 나올 정도였다. 특히 소련 사회의 부조리를 매섭게 비판하는 <인터걸> 같은 영화에서 시작해 훗날 컬트적으로 인기를 얻은 <이글라>, <킨자자!>같은 작품까지 당시 어려웠던 사회상과는 별개로 오늘날까지도 화자되는 명작이 다수 배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